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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작가들의 작품들을 소개 하는 곳입니다.

선생님 2009-10-16 15:31 조회 수 2132 댓글 수 1


 

파도의 심성(心性)으로 각인되는 화산섬의 풍토미

 

 

 

김 유 정 (미술평론가/제주문화연구소장)

 

자연을 대상으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가 익히 부르는 자연미라는 것이 우리들의 심성이나 정서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는 셈이다. 우리 앞에 놓여진 자연을 새롭게 번안(飜案)하는 일은 많은 작가들이 시도하는 바이다.

자연적 대상에 자신의 심리상태를 투사하며 자신의 미적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작가 고유의 업(業)으로서, 창작의 질과 양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러나 자연을 관조하거나 재해석하는 일은 주관적인 미적 판단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 내면의 외침 같은 표현력은 자신의 환경과 생활조건, 일상에서 획득된 사회정신 등과 연관을 갖는다. 결국 하나의 작품은 의미체계의 집합체이며, 사회적 시선이고, 자신의 정신적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제주를 빨리 이해할 수 있는 자연 대상 중에 하나가 바다이다. 바다는 삶의 터전이며 수많은 애환이 들어 있는 노동의 현장이다. 바다는 파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파도는 다시 바람에 의해 각인된다. 자연의 이치란 그 대상들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존재를 찾는 것이 아니던가 .

 

이런 맥락에서 보면, 문행섭의 파도는 해저의 심연(深淵)으로부터 온다. 그 심연은 물론 자신의 정신세계이자 바깥 세계와 새로운 교감을 나누기 위해 준비된 내면의 공간이다. 내면의 구조에서 울려 퍼지는 그의 파도는 그의 정신상태이며, 그 울림은 단순한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육성(肉聲)이다. 그는 자연의 파도에 마음을 싣고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때로는 회색빛의 하늘로 솟구치다가도 다시 빠르게 심해(深海) 속으로 되돌아가 부서진 포말을 덩어리로 말아 올린다. 그의 마음은 자연의 긴장감 있는 상태로 환원된다.

 

문행섭은 석다(石多)의 바람곶에서 풍다(風多)의 길목을 지킨다. 이 길목은 신화적으로는 풍요의 신인 영등할망의 길이며, 역사적으로는 교류의 길이다. 또한 이 길은 사회적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감정을 이어주는 끈이며, 스스로에게는 자신을 가르치는 자각(自覺)의 장(場)이다.

 

사실, 문행섭에게 있어서 바다는 모든 이야기의 근원이다. 섬을 에워싼 거대한 물줄기의 벽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 유독 많은 신들, 창조적 힘이 넘치는 신들의 이야기와 지리적 조건이 가져다 주는 참담한 좌절과 저항은 바다에서 나고 자란 제주인의 심성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제주의 이야기들은 풍부한 색채를 갖고 있고, 예술적 확장 가능성의 잠재력이 매우 높다. 그가 바다에 눈을 돌린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바다를 알려면, 파도를 알아야 한다. 파도는 바다의 조건들을 변화시키는 자연 작용이다. 영원히 바다를 썩지 않게 하는 파도의 일렁임은 창조적 작용으로 재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파도를 보면 바람길을 안다. 바람(風)은 상징적으로 ‘시련’, ‘파괴’, ‘자유’, ‘삶의 역동’, ‘스타일’, ‘징조’ 로도 불린다. 바람의 고향이기도 한 제주는 이 상징어들이 모두 적용되는 땅이다. 이 땅은 바로 고립성과 진취성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일렁이는 파도는 변화의 모습이다. 바람은 가변적이고 역동적이기 때문에 그 변화를 조종한다. 문행섭은 바람과 파도의 관계를 통찰하면서 자연과 내면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자연으로서의 바다와, 바람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파도의 관계처럼 존재로서의 인간 내면과 그 존재를 일깨우는 감각의 바람으로 이 세계와 교감하고자 한다.  그는 결국 자신이 준비한 내면의 ‘파도(波)’로 묵었던 관념의 바위들을 ‘깨치면서(破)’ 스스로 일어서는 자각의 파도가 되어 현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자신의 고독한 풍파(風波)인 그의 파도는 단지 자연의 현상이 아닌 인간 세상에서 불어오는 외풍(外風)에 대한 대사회적인 견해와 일치한다.

 

문행섭의 ‘波’ 연작들은 적막과 침묵을 깨면서 서서히 일어서고 있다. 그는 파도라는 대상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묘사하기 보다는 추상적 속필로 풀어 헤치고 있다. 그의 조형적 방법은 묘사의 간단성과 절제된 표현으로 자유로운 추상적 구조상을 이룬다. 그러나 그의 그림들에 혼재된 단순함과 복잡함 사이의 변증법은 추상성을 짙게 띄면서도 긴장감을 놓지 않고 있다.  

 

파도의 자연적 속성과 상징적 속성들을 표현하고자 한 그의 노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열정적이다. 빠른 붓놀림과 큰 붓자국의 조화, 검푸른 바위와 흰 포말로 대표되는 관념의 대비는 안일한 사고들을 단절(斷絶)시킨다. 대해(大海)로 펼쳐지는 평원법의 여유로운 구도에서는 선(禪)적인 삶의 시선이 묻어난다, 홀로 우뚝선 바위로 다가가는 부감(俯瞰)의 구도는 흔들리는 세상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자아의 예각적 모습일 것이다.  

 

단순함은 복잡함에서 나온다. 추상성은 구상성을 전제로 할때 풍부하다. 사물의 형상을 달리 표현하고자 할 때 겪는 창의적인 감정은 기존 관념과의 인식론적 단절(斷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현재의 세계를 자각하고, 달리 인식하고, 예각적인 조형 방법을 심상에 각인시키고자 하는 이번 전시는 자연의 파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심상의 파도를 일깨우며 서서히 일어서는 것은 구세계의 벽을 때리고 묵은 관념과의 단절을 위한 새로운 풍토미의 발현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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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서는 바다..
근대의 어느 단편소설 제목같아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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