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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이전에 출생한 미술가들을 소개 해두었으며 출생일 순으로 정렬 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미술의 흐름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선생님 2013-03-05 12:41 조회 수 2713 댓글 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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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1650년
캔버스에 유채, 98×74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17세기 프랑스 미술에는 이 나라의 지리적 위치가 반영되어, 북쪽에 자리한 플랑드르에서 유래한 ‘사실주의적’인 흐름과 남쪽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궁정 바로크’ 양식이 함께 나타난다. 이 둘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졌던 것은 이탈리아 미술을 기반으로 한 또 하나의 경향인 ‘고전주의’였는데, 이 분야의 대표적인 인물이 화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이다.
 
루벤스, 렘브란트와 함께 17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었던 화가였고 ‘프랑스 회화의 아버지’라고 불렸던 푸생은 서양 미술의 지적이고 이론적인 전통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의 역사화는 17세기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의 주요 토론 주제이자 모범이었고, 그후 2세기 동안 유럽 전역에서 숭앙 받고 모방되었다. 이런 사실 때문에 그는 ‘제도권’ 인물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나 이는 모두 그가 죽은 뒤에 일어난 일이다. 생전의 그는 당시의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그 시대의 관습에 맞서 독자적으로 자기만의 조형 언어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푸생은 노르망디 레 잔드리(Les Andelys)의 공증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최초의 미술 수업은 고향에서 활동하던 화가 켕탱 바랭(Quentin Varin)에게서 받은 것으로 보이며, 18세가 되는 1612년에 파리로 가서 십여 년을 머물며 화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발자크가 단편 소설 [미지의 걸작 Le Chef-d’oeuvre Inconnu]에서 이 시기 푸생의 생활을 상상해본 적이 있으나, 서른 살 이전의 그림과 그 행적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실제 그의 활동이 어떠했는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수업기와 활동 초기의 그가 주로 접한 미술은 퐁텐블로 화파의 매너리즘(bella maniera)이었기 때문에 복잡한 구성, 과장되고 왜곡된 형태, 우아한 윤곽선으로 그려진 길고 호리호리한 인물 등을 특징으로 하는 이 사조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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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영감] 1629년경 
캔버스에 유채, 182×213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고전주의의 중심에서 그린 시

푸생은 30살이 되는 1624년에 로마로 갔다. 고전 고대(classical antiquity)의 중심 로마는 17세기 초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였고,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마지막 작업을 했던 미술의 성지이자 수도였다. 유럽 모든 나라의 화가들이 이곳에 와서 미술 수업을 했으나 보통은 고국으로 돌아간 데 반해, 푸생은 죽을 때까지 40여 년을 이곳에 머물며 작업을 했다. 당시 가장 중요한 후원자는 교황이었고, 푸생도 바티칸의 주문으로 성 베드로 성당의 제단화 [성 에라스무스의 순교]를 제작했으나 카라바지오, 베르니니 등의 화려하고 역동적인 바로크 미술을 선호하던 후원자의 취향과 잘 맞지 않았다.
 
또 한 명의 주요 후원자인 황제 루이 13세가 루브르 궁의 장식을 위해 1640년에 그를 부른 적이 있는데 이 역시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지 못했다. 조수 없이 작업하는 그의 방식과 차분한 화풍은 시선을 끌어야 하는 대형 회화 작업에 어울리지 않았다. 이후 그는 교회나 왕궁이 아니라 고전 고대에 관심이 많았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개인들을 후원자 삼아 작업을 했다.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당대에 인기 있던 화풍을 따르는 타협을 하지 않고 자기 논리만을 좇아 탐구를 계속했다. 이 ‘논리’가 푸생 회화의 성격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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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승천 (L'Assomption de la Vierge)

이 작품은 푸생의 작품 중 특이하게 구성된 예이다. 승천하는 성모와 이를 돕고 있는 천사들의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대신 푸생의 작품에서 탁월하게 드러나는 풍경은 화면 아래쪽에 극도로 낮게 표현되어 있다. 이처럼 저 멀리 보이는 고대 건물과 지평선, 그리고 그 위를 안정감 있게 오르고 있는 성모의 모습은 ‘승천’이라는 주제를 부각시킨다. 특히 중심인물들은 상당히 바로크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바람에 휘날리는 옷깃이나 대담하게 몸을 비틀고 있는 천사의 포즈,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강렬한 빛으로 강한 명암 대비 등이 그것이다. 이는 17세기에 즐겨 다루던 모티브였다. 그래서인지 흡사 바로크 조각의 거장 베르니니(Bernini)의 대리석 조각 작품을 보는 듯하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고, 고국인 프랑스 왕실의 신임을 얻기도 했던 푸생은 작업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역사가 벨로리(Giovanni Pietro Bellori)가 1672년에 쓴 푸생의 전기를 보면, 그는 규칙적으로 생활을 하였고, 하루의 대부분을 작업실에서 보냈다고 한다. 잠시 쉬거나 산책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작업을 하는데 시간을 보낸 것이다. 벨로리는 이러한 생활이 있었기에 “다른 어느 화가보다 위대한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고 했다. 또한 푸생의 예술론은 명성이 높아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그가 아침, 저녁으로 다니던 산책로에 항상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푸생은 그들이 어떠한 직업과 지위를 가졌는지 개의치 않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지만 푸생은 자신이 주목 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는 실제 1640년 프랑스 궁정에서 최고의 대우로 초청했음에도 결국 2년도 있지 못하고 이탈리아로 돌아왔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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