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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작가들과 작품을 소개하는 곳입니다.

선생님 2009-11-06 21:15 조회 수 4035 댓글 수 0

 

Ⅰ.
이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은 숲으로부터 시작한다.

조용한 숲 어느 언저리에 포박당해 있던 한 사내가 깨어난다. 상처투성이의 그 사내가 기진맥진한 육신을 이끌고 숲을 가로질러 기어가다 마침내 어떤 연못에 도달한다. 이 이야기가 펼쳐지는 전시장의 정적(靜寂)은 사람들로 하여금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도록 유혹하는 올가미이다. 흐릿하면서 모호하지만 침묵을 강요하는 듯한 숲은 신비롭고 신성한 장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기에는 길도, 좌표도 없다. 따라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힘겹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고통이자 공포이다.

신곡(神曲)』의 지옥편 첫 부분에서 단테(Alighieri Dante)는 ‘생의 절반을 보낸 나는 올바른 길을 잃고 어두운 숲 속에 홀로 서 있었노라’고 쓰고 있다. 단테가 노래한 어두운 숲은 무지(無知), 죄, 탐욕과 부패로 얼룩진 인생을 상징한 것이었지만 천성명의 작품에서 숲은 이러한 윤리적, 도덕적 차원에서의 자기고백이라기보다 뚜렷한 목적지 없이 방황하는 우리의 뿌리 뽑힌 삶을 은유한다. 실존의 무거움이 결박의 형태로 표현된 것이라고 한다면 상처는 존재의 당위성을 확인하는 힘겨운 몸부림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상처투성이의 고단한 육신이 마침내 도착한 연못은 자기를 비추는 거울일까. 그러나 그것은 나르키소스를 최면에 빠지게 만들었던 마법의 거울이거나 플라톤이 말한 바 있는 동굴의 그림자라기보다 존재의 진실을 투영하는 내면의 창이다.

연못은 나의 아트만(atman)이 빠져죽고 또 부활하는 내면의 공간을 암시한다. 자기애의 거짓된 환상과 열정이 들어설 여백을 허락하지 않는 이 공간은 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삼켜야 하는 투쟁의 장소인 까닭에 피투성이의 육신에게 안식은 여전히 유예되고 있다. 우화적이면서 은유적인 이 자기고백적 이야기는 인연의 끈으로 연결된 입체작품에서 극적인 비약을 한다. 그것은 존재의 덧없음에 대한 한탄이 아니라 상처받은 육신이 갈망하는 영혼의 자유, 곧 구원에 이르기 위해 치러야 고통스러운 통과의식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천성명의 ‘그림자를 삼키다’는 자기를 제물로 삼아 육체를 넘어서는 정신의 해방을 꿈꾸는 제의적(祭儀的)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삶이란 자기와 타자에게 지속적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것. 작업은 이 상처를 드러내고 마치 짐승들이 그러하듯 그것을 핥아주는 행위와도 같은 것. 그런 의미에서 천성명은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운명에 대해 들려주기 위해 이 이야기의 배경을 어두운 숲으로 설정했는지 모른다.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하는 새, 그것이야말로 작가, 그리고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그와 우리가 지향하는 아브락사스란 신은 어디 있는가? 아브락사스는 없다. 그것이 신의 부재를 외치거나 종교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신은 바로 내 마음에 있기 때문에. 그는 그림자를 삼킴으로써 해방을 꿈꾼다.

그것을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라 하기에 우리는 여전히 존재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 그래서 그는 상처 입은 육신을 이끌고 아직까지 숲을 방황할 수밖에 없다.

 

 

천성명, 그림자를 삼키다(swallowing the shadow), 혼합재료, 85x37x36cm, 2008

 

Ⅱ.
천성명의 작품은 줄거리가 있어서 서술적일 뿐만 아니라 전시공간을 무대처럼 활용한다는 점에서 연극적 특징을 지닌다. ‘광대, 별을 따다’(2000)로부터 시작하여 ‘잠들다’(2001), ‘길을 묻다’(2002), ‘거울 속에 숨다’(2003), ‘달빛 아래 서성이다’(2005)에 이르는 그의 개인전 제목들은 그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압축하여 보여준다. 제목 자체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작품은 자기성찰적이며 자기를 출발점으로 하여 조직이나 사회의 폭력과 그것이 만들어놓은 상처를 표현하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 하나의 ‘전형’처럼 등장하고 있는 인물은 삭발한 자소상이다. 얼굴은 성인이지만 체구는 소년보다 조금 작은, 그러나 가로줄무늬 셔츠를 입고 있기 때문에 연극적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는 이 주인공은 귄터 그라스가 쓴 소설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에 대해 떠올리게 만든다. 인간의 모순과 시대의 위기를 목격하며 스스로 성장을 포기한 ‘오스카’는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자신이 본 독일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가차 없이 폭로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시대를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들의 우울하면서 상처받은 초상을 초현실적으로 그려낸 이 소설의 주인공인 오스카가 어깨에 메고 다니던 양철북이야말로 시대의 불운을 증명하는 소리이자 전체주의에 열광하며 제도의 폭력에 휩쓸려가는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로 향한 분노와 연민의 소리이며, 나아가 잠든 영혼을 깨우는 각성의 소리를 은유한다.

 

 

 

 

천성명,그림자를 삼키다,혼합재료, 가변크기, 2008

 

 


천성명의 작품에서 성장을 멈춰버린, 그래서 얼굴은 어른이지만 신체는 여전히 왜소한 이 인물은 오스카처럼 거대한 폭력 앞에 전면적으로 노출된 존재는 아니지만 개인에게 가해진 물리적, 심리적 폭력에 의해 상처받은 개인임에는 분명하다. 공포에 질린 듯 퀭하면서도 무기력해 보이는 눈, 반쯤 헤벌린 입, 그래서 거의 얼이 나가버린 표정은 어딘지 잔뜩 겁에 질려있거나 자포자기한 사람의 멍청한 상황을 암시한다.

피멍이 든 눈자위와 예리한 흉기로 찔린 듯한 신체는 무자비한 폭력을 받아들여야 하는 가련한 피해자로서 주인공의 나약함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신체에 새겨진 상처는 물리적 폭력의 흔적일 수 있으나 그의 이야기구조를 보면 오히려 그것은 심리적 상처에 가깝다. 더욱이 천성명의 작품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예컨대 샴쌍둥이로 표현된 자소상을 보면 작가 자신이 공격적인 가해자이자 수동적인 피해자임을 암시한다.

그중 하나는 뒤쪽의 인물이 앞 인물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위협하고 있고, 다른 샴쌍둥이는 비명을 지르는 또 다른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어서 마치 영화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사건의 위기의 과정(sequence)이나 장면(scene)을 떠올리게 만든다. 자해와 가해의 혼재, 언뜻 사도마조히즘에 대한 증언 같으면서도 불안하고 침울한 주인공의 표정은 근거를 밝힐 수 없는 공포에 짓눌려 있고 무언가 하소연을 하거나 호소하기 위해 막 말문을 열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으므로 병리적 도착과는 거리가 멀다.

 

 

 

천성명, 그림자를 삼키다1, 가변설치, 섬유강화 플라스틱, 아크릴 채색, 2007

 


이 애매함으로부터 서사(敍事)의 가닥을 잡기 위해 다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숲에서 일어난 사건을 압축한 전시장 가운데 한 사내가 양손에 검은 실타래를 쥐고 서 있는데 마구 뒤엉긴 이 실마리들이 그 사내의 발목을 칭칭 감고 있어서 그는 전진도 후퇴도 하지 못하는 매우 어정쩡하고 엉거주춤한 상태로 망연자실하고 있다. 그는 한탄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자포자기하고 있는 것일까. 그 모호한 표정이 결박당한 사내가 느끼는 구속감을 더욱 고조시킨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이 사내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한 채 창밖을 바라보며 서있는 새의 형상을 뒤집어쓴 인물이다.

이것은 그의 분신인가, 아니면 결박당한 그의 영혼을 이끌고 갈 상스러운 짐승(瑞獸)인가? 고대 중국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봉황, 용, 기린, 호랑이, 날개달린 천인(天人) 따위가 그 사람의 혼을 영원한 행복을 약속받은 선계(仙界)로 인도한다고 믿었다. 아이가 뒤집어쓰고 있는 새의 형상은 중국 고대 설화 속의 전설적인 동물보다 이집트 태양의 신 호루스의 상징인 매와 더 유사하다. 흥미로운 점은 이 새의 형상을 뒤집어 쓴 아이가 각 전시장마다 출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새는 이야기구조에서 철저하게 방관자로 일관하고 있다. 이야기를 매개하면서도 그 구조 속에 끼어들지 않기 때문에 이 존재를 국외자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작품 속에 전개되는 사건을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의 존재는 여전히 중요하다. 이야기에 몰입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 바깥 풍경을 보라.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갑자기 분명해지며 우리는 작가가 걸어놓은 이야기로부터 거리를 유지한 채 그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짧은 여유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이 새의 형상은 그가 꾸며놓은 플롯(plot)의 각 연결지점에 위치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또 다른 화자(話者)임을 알 수 있다.

 

 

 

천성명, 그림자를 삼키다, 혼합재료, 가변크기, 2008

 


한 층을 내려오면 망토를 걸친 채 앉아있는 작가의 거대한 자소상과 마주치게 된다. 망토는 새의 날개와 묘하게 교차하면서 비상(飛翔)하고자 하는 욕망에 대해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거대한 인물의 두 발은 아래층의 천장에 매달려 있는데 실제로는 육중한 대좌 위에 앉아있는 형상이다. 이 기념비적인 대좌는 이 거대한 자소상을 권력적인 존재로 부각시킨다. 그의 상반신이 놓인 장소에서는 그것을 깨달을 수 없다.

이 방으로 들어서기 위해 우리는 다시 새의 형상을 뒤집어쓴 아이에 만난다. 그러나 그 옆에 창백한 얼굴의 한 소녀가 풍경을 들고 마치 숨바꼭질하듯 거대한 자소상 등 뒤에 숨어 있다. 이 주인공과 대면하고 있는 것은 물고기 탈을 쓴 소년이다.

연못의 그림자가 여기에서는 물고기 탈을 쓴 소년의 모습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까닭에 물고기 탈을 쓴 소년이 실체라면 거대한 기념비로 나타난 자소상은 나를 부풀린 나의 그림자일 수 있다. 언제 폭발해버릴지 모를 풍선과도 같은 나. 풍경을 든 소녀는 이 권력자의 가망 없는 욕망의 허구를 일깨워주는 관음(觀音)이고 베아트리체이다. 그 소녀가 든 풍경은 이 권력자의 잠 든 영혼 속으로 울리는 소리를 암시한다.

 

 

 

천성명, 그림자를 삼키다, 혼합재료, 가변크기, 2008

 


천성명의 ‘그림자를 삼키다’가 궁극적으로 자기부정을 통한 정신의 해방을 지향하고 있음은 지하층의 다양한 형태로 집결한 자소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야기의 첫머리에서 시작된 인연의 끈이 이 공간에 놓인 한 자소상의 상반신을 감고 있음을 볼 때 우리가 따라온 이야기가 결국 작가 자신의 자기고백임이 드러난다. 너는 나의 분신, 너의 상처는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므로 그것을 위무하고 치유할 수 있는 존재도 결국은 나일 수밖에 없음을 그는 이 드라마를 통해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직하면서도 열에 들뜬 이 고백의 과잉을 전적으로 작가만의 독백이라 할 수는 없다. 이 작품들은 우리의 부박(浮薄)한 삶이 실제로는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회색조의 모노톤은 영혼이 빠져나가버린 시체, 영혼이 떠난 껍질로서의 육신의 허망함에 대해 떠올리게 만드는 한편 나약하고 비참하지만 여전히 소중한 우리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붉은색 상흔(傷痕)이 육체의 비참을 고조시키는 그 지점에 부패와 소멸을 거부하려는 의지가 작동한다. 그러나 혼자 그것을 감당하기에 나는 무력하기 때문에 새, 풍경 등을 통한 상징적 치유가 필요하다.

 

 

 

천성명, 그림자를 삼키다, 혼합재료, 가변크기, 2008

 

 

Ⅲ.
천성명이 연출해놓은 이야기구조를 보면 어느 면에서 순환적임을 알 수 있다. 누가 나의 존재를 파멸의 파국으로 이끌고 있는가? 사회는 나의 사유, 행동, 표현을 억압하는 장치이므로 나는 그것으로부터 상처받은 피해자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과 말로, 행동으로 타자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결국 살아가는 과정에서 정신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우리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일 수 있다. 나에게 상해를 입히는 것은 나를 옥죄고 있는 제도, 사회일 수도 있지만 원천적으로 그 원인은 나로부터 비롯한다.

 

 

 

천성명, 그림자를 삼키다, 혼합재료, 가변크기, 2008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제왕이자 욕망의 감옥에 갇힌 죄수이고, 영웅이자 노예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그림자이지 실체는 아니다. 상처 입은 가련한 존재로서 나의 본질이 그림자에 가리는 순간 나는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망각의 동굴 속에 유폐된다.

누가 이 미망(迷妄)의 땅으로부터 나를 건져낼 것인가. 그래서 종교는 고해(告解)와 수도(修道)의 가치에 대해 가르치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천성명이 특정종교에 호소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종교적인 차원에서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전시장으로 진입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출입구 문설주 위에 놓인 풍경을 든 소녀의 모습은 그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마치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 신성한 장소로 진입했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소녀는 우리로 하여금 익숙하면서도 낯선 해방지대로 인도하는 매개자처럼 출입구 위에 앉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소녀는 자기 스스로 또는 타자로부터 입은 상처에 대해 짐짓 고통스러워하는 내 마음의 평온을 위해 성불을 미루고 중생구제에 대해 고뇌하고 있는 미륵일 수도 있고, 나의 영혼이 길을 잃고 더 이상 어두운 숲을 방황하지 않도록 인도하는 진리의 사자(使者)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새의 형상을 뒤집어 쓴 소년, 물고기 탈을 쓰고 있는 소년은 내가 망각하거나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순수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이 전시의 중요한 메타포인 인연의 끈처럼 모든 것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으며 그것은 불연속적이고 단절된 것이라기보다 우리의 삶 속으로 관통하고 있다. 거울에 비친 나의 상처 입은 육신은 허구가 아니다. 비록 나의 고통이 과잉된 것일지언정 그것을 통해 나는 존재의 겸허함에 대해 깨닫는다.
나는 나를 극복하기 위해 나의 그림자를 삼켜야 한다. 그래서 나는 더욱 자유로울 수 있다.

  나의 그림자, 내가 삼킨 나. - 최태만/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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