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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으면 도움이 될만한 자료들을 올려두었습니다.

추상에 드러난 ‘존재의 얼굴’

20세기 회화에 나타난 중층적 재현… 감춰진 실재를 찾는 존재론으로의 여행

 

이정우의 철학카페 20|현대 회화


사진/ 세잔, <생 빅투아르 산>(1902-1904). 캔버스에 유채, 70×90cm, 필라델피아, 필라델피아 미술관 조지 엘킨스 컬렉션.

세잔 이후의 현대 회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극히 다채로운 갈래들을 형성한 20세기 회화를 이해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또 본성상 차이이고 생성이고 창조인 예술을 일정한 개념으로 가두는 것이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문화는 우리가 얼핏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구조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저 숱한 ‘경우들’ 앞에서 그때그때의 이해에 머물 것이다. 20세기의 회화들, 적어도 철학적으로 검토할 대상이 되는 회화들을 관류하는 존재론적 원리를 찾아내는 일은 헛된 작업이 아닐 것이다. 20세기 회화는 철학과 거의 한덩어리가 되어 움직였다. 20세기만큼 예술이 철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서 진행된 시대는 없었다. 그림은 시각화된 철학이요, 철학은 개념화된 그림인 것이다. 세잔 이후의 회화사를 관류하는 원리를 찾아내는 작업이 가능할 뿐 아니라 필수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는 20세기 회화의 공간적 원리로서 구조를, 시간적 원리로서 힘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구조와 힘이라는 두 원리가 마치 타원의 두 초점처럼 작용하면서 어떻게 현대 회화를 이끌어갔는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추상을 선택한 20세기 회화


사진/ 몬드리안, <나무>(1912). 캔버스에 유채, 94×69.8cm,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


20세기 회화는 추상성을 그 일반적인 특징으로 가진다. 고전적인 그림과 현대의 그림을 비교해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현대 회화의 추상성이다. 추상성이야말로 정리하기 힘든 20세기 회화사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일반적인 사항일 것이다. 추상 회화란 무엇인가? ‘추상’은 사물로부터 ‘뽑아내다’를 뜻한다. ‘absrein’에서 유래한 ‘abstract’는 예컨대 책상에서 다른 측면들을 모두 무시하고 그 윤곽만 뽑아냈을 때 성립한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의 추상 개념으로는 현대 회화를 설명하기에 역부족이다. 기껏해야 그것은 추상 회화가 성립하는 과정의 한 공정을 설명해줄 뿐이다.

그렇다면 추상 회화는 사물을 재현하지 않는가? 추상 회화도 상당부분 사물을 재현한다. 예컨대 우리는 칸딘스키의 그림에서 바이올린을 보고, 몬드리안의 그림에서 나무를 본다. 그럼에도 추상 회화는 ‘재현’이라는 전통 회화의 기초를 무너뜨렸음에 틀림없다. 추상 회화는 회화가 더이상 사물의 재현이기를 거부한다는 것을 뜻한다. 피카소로부터 오늘날의 회화에 이르기까지 현대 회화는 전통 회화와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미학적 길을 걸어왔다. 이로부터 세 가지의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첫째, 20세기 회화는 왜 추상을 선택했는가? 둘째, 20세기 회화가 사물의 재현을 포기했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그리는가? 이 두 번째 물음은 20세기 회화(적어도 일급의 -존재론적 함축을 지닌- 회화)가 어떤 일반적인 ‘테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런 전제를 인정할 경우 세 번째 물음이 제기된다. 현대 회화의 다양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첫 번째 물음은 회화 자체 내의 문제만이 아니라 현대 문화 전체의 문제다. 두 번째 물음은 전형적인 존재론적-인식론적 물음이다. 세 번째 물음은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개별 연구들을 통해서 답할 수 있는 문제다.

무한에 가까운 연구를 요구하는 앞의 두 물음들에 대해 일단은 다음과 같은 가설들을 제기해 놓고자 한다. 세 번째 물음에 대해서는 다음 호부터 전개되는 개개의 회화론이 담당할 것이다.

재현의 파기가 아니라 새로운 재현


사진/ 칸딘스키, <인상 III>(음악회·1911). 캔버스에 유채, 77.5×100cm, 뮌헨, 렌바흐하우스.


왜 현대 회화는 추상성을 선택했는가? 따지고 보면 그림은 원래 추상이다. ‘재현’이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 2차원에 그린 그림은 3차원에 존재하는 그 존재가 분명 아니다. 플라톤은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림의 인식론적 가치를 문제삼지 않았던가. 그러나 플라톤의 생각은, 나아가 이런 식의 재현 개념에 기반하는 생각은 원래부터 오해다. 회화는 결코 사물을 재현할 수 없다. 재현이라는 말을 ‘모습’의 재현으로 이해하는 한. 우리가 실제 보는 사물은 결코 그림으로 완벽하게 재현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림의 본질을 왜 재현으로 보는가? 모습의 재현으로 회화를 규정하는 한 회화는 플라톤적인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 그렇다고 재현이라는 개념 자체가 회화를 왜곡시키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본질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재현이라는 개념 자체다. 재현이라는 말을 어느 한 층위에 고정시킬 때 회화의 본성에 대한 갖가지 오해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회화의 어떤 시기들에서 재현이란 모습의 재현, 외관의 재현이었다. 그러나 다른 시기들에서 회화는 사물의 본질, 그 형상의 재현이었다. 그러나 인상파의 시대에 이르면 이제 주체에 의해 이미 정돈되고 평균화된 모습이 아니라 매순간 주체에게 나타나는 그대로의 사물이 재현된다. 물론 이것은 사진의 등장 등 여러 외부적 요인들과 맞물려 형성된 결과다. 첫 번째 재현을 ‘현실의 재현’으로, 두 번째 재현을 ‘실재의 재현’으로, 세 번째 재현을 ‘생성의 재현’으로 부르자. 물론 이런 차이는 무수한 차이들을 평균화한 것일 뿐 실제 재현은 무수한 층차로 나타난다. 따라서 현대 회화는 재현을 포기하지 않았다. 현대 미학의 대전제, 즉 재현의 파기라는 생각은 빗나간 생각이다. 추상은 재현의 파기가 아니라 재현의 한 형태다. 현대 회화는 재현의 층위를 바꾸었을 뿐 재현을 파기한 것은 아니다. 이로부터 두 번째 물음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현대 회화는 무엇을 재현하려 하는가?

과거의 회화들, 평범한 회화들은 사물의 외관을 모방했고,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로 하는 다른 회화들은 사물의 본질/실재를 모방하려 했다. 그러나 인상파는 현상의 생성 자체를 모방하려 했다. 우리는 현대 회화를 이 세 가지 고전적인 재현을 넘어서는 한에서 또다시 실재를 재현하려 한 행위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곧 철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소박 실재론(현실의 재현), 생성철학(인상파), 그리고 본질철학(전통적인 실재 재현)을 모두 넘어서는 새로운 형태의 실재 재현의 추구. 왜 세잔은 현대 회화의 아버지인가? 그것은 바로 세잔이야말로 이 세 재현을 모두 넘어서는 새로운 재현을 명확히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20세기 회화사는 세잔의 뒤를 이어 존재의 새로운 얼굴을 찾아나선 영웅적인 노력의 역사였다.

현대 회화를 어떻게 볼 건가

20세기 회화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재현을 파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 발견한 실재, 새로운 차원으로의 육박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듯이 현대 회화가 실재 개념을 파기한 것이 아니다. 다만 새로운 실재, 그때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실재를 찾아나선 것이 회화다. 적어도 깊이있는 회화들은 그렇다. 바로 이것이 20세기 회화가 바로 존재론이기도 한 근본 이유다. 이제 20세기의 회화-존재론으로의 긴 여행을 떠나자. 우리의 여행은 완벽하게 짜여진, 준비된 여행은 아니다. 많은 시행착오와 우회, 실패가 뒤따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해 20세기 회화-존재론 이해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철학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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